‘세계 여성의 날’, 폭로에 담긴 투쟁
‘세계 여성의 날’, 폭로에 담긴 투쟁
  • 한혜리
  • 승인 2018.04.02 11:00
  • 조회수 2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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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맥주 한 캔과 함께한 야근을 마치고 택시를 잡아탄다. 택시 운전기사는 야근에 찌들고 희미하게 알코올 향을 풍기는 내게 “여자가 왜 이렇게 늦게 다녀”, “여자가 늦게까지 술 마시면 안 되지”라고 한다. 나는 오늘도 일상에서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을 당한다.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 여자는 왜 늦은 밤거리를 다니면 안 되는 것일까. 여자는 왜 늦은 밤에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답한다. “위험해서.” 과연, 늦은 밤거리를 걷는 것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것이 위험한 사회가 정상일까. 그렇다면 여성의 일상은 늘 생존의 위협을 받는 서바이벌일까.

 

대학교에 다닐 때, 그러니까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됐을때, 여자인 친구들에게는 대부분 ‘통금’이 존재했다. 즐겁게 놀다가도, 과제를 하다가도 ‘통금’ 10시가 되면 칼같이 집에 들어가야 했다.

 

통금이 존재하지 않는 친구는 남자인 친구들과 ‘오빠’가 있는 여동생들이었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자인 ‘오빠’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시간에서도, 늦은 밤의 서바이벌에서도 자유로웠다.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국제 연합기구인 UN이 선정한 이 날은 매년 돌아오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특별하지 않은 날이다.

 

하지만 2018년 한국에서 맞이하는 ‘세계 여성의 날’은 절대 ‘그냥’ 지나갈 수 없게 됐다.세계 여성의 날’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벌어진 여성들의 시위에서 시작된 날로, 정치적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여성들의 정당한 투쟁을 기념비적으로 기리기 위해 정해졌다.

 

‘세계 여성의 날’의 근원이 된 20세기 초에 시작된 여성들의 투쟁은 2018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방증은 현재 계속되고 있는 여성들의 폭로다.

 

폭로의 시작은 아주 작았다. SNS에 해시태그를 다는 정도. ‘#문단_내_성폭력’이란 한 줄도 안 되는 작은 문구는 각 분야로 퍼져 ‘#OO_내_성폭력’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과연, 가부장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있던 나라답게 폭로는 점점 거대해졌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도 같은 결의 운동이 일었다. ‘#MeToo’, 문장은 더 간결해졌고 부피는 더욱 커졌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보면, 그즈음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여성이란 이유로 벌어진 참혹한 사건에 여자들은 해시태그를 달던 온라인을 벗어나 거리에서 폭로했다. 이는 곧 또 다른 해시태그로 이어졌다.

 

‘#살아남았다’. 여성들은 그간 사소한 일상에서, 혹은 직장에서 등 모든 곳에서 벌어진 성차별과 폭력을 분출하듯 토해냈다.

 

현직 검사는 검찰 내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고, 문인들은 문단의 권력을 쥐고 있던 기득권 남성 문인들에게 받은 성추행을 폭로했다. 작은 해시태그는 나비의 날갯짓 처럼 태풍과 같은 투쟁을 일궈냈다. 폭로는 곧 투쟁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정당한 권리를 얻기위한 싸움. 그렇다고 화려하진 않다. 그럴 필요도 없고. 투쟁 속에는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본 권리에 대한 여성들의 소망이 담겨 있을 뿐. 여성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데 더 이상 생존의 위협을 받고 싶지 않다.

 

‘세계 여성의 날’의 시발점인 1908년 투쟁도 같은 맥락을 지닌다. 동등한 삶을 위하여 투표권과 정치권을 획득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로부터 110년이 지난 지금, 본질은 달라졌을까.


2018년인 지금도 투쟁의 의미가 담긴 폭로가 줄줄이 이어지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추행과 폭력을 당한다.

 

여자라면 응당 치마를 입어야 하고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면서 여성의 치마 속을 불법 촬영하고 희롱을 일삼는다.

 

여성은 늦은 밤의 위협을 감수해야만 하고, 택시를 타도 기사에게 훈계로 포장된 차별적인 발언을 들어야 한다. 100년이 넘게 두들겨온 ‘유리천장’이 아직도 단단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하다.

 

‘세계 여성의 날’은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처럼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쁘게 기념하는 날은 아니다.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는 날도 아니다.

 

그저, 해시태그 폭로전부터 거리시위, 그리고 현직자의 언론 보도 폭로까지 이어진 일련의 투쟁에 담긴 여성들의 단 하나의 소원과 오랜 시간이어져 왔던 불평등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이다.

 

‘#OO_내_성폭력’, ‘#MeToo’로 번진 폭로성 투쟁은 서서히 ‘유리천장’에 금을 내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은 미세한 균열일지라도, 내년 ‘세계 여성의 날’엔, 또 내후년 ‘세계 여성의 날’엔 구멍이라도 뚫린 ‘유리천장’
이 되지 않을까 희망한다.

 

2018년 또 다시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오늘도 일상의 혐오에 투쟁하는 당신에게, 불평등과 폭력을 폭로하는 당신에게, 또는 존재하는 모든 당신에게 작은 응원을 보낸다.

 

“We want bread, but roses, too!
(우리에게 빵뿐만 아니라 장미도 달라!)”

 

한혜리기자 news@wedding21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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