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좋은 드라마를 찾아내는 감(感)은 있다고 자부합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최고의 이혼> 이야기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저에 관한 시시콜콜한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저는 부정적이며, 비판적이고, 회의적인데다 공격적이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희망 가득한 새 출발을 축하하고 가이드 해야 하는 웨딩잡지 편집장으로 맞는 건지, 사실 이곳에 오기 전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혼이야말로 당신처럼 얄짤 없는 사람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나? 제발 더 이상 결혼을 얘기하면서 사탕발림은 집어치우라고 해.” 똥은 똥끼리 모인다고 그녀는 제 30년 지기가 맞습니다.

여하튼, 이제부터 기혼자로서 또 웨딩잡지 편집장으로서 조심스럽게 결혼의 자리매김을 한번 해보려 합니다(외연은 그러하나 내포는 결혼에 관한 환상을 자끈동 부러뜨려 보겠노라~ 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죠).

남부럽지 않게 연애를 하고 하늘이 내린 운명이라는 판단으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치룹니다. 1, 2년은 행복할 거예요, 깨도 볶을 거고. 자녀가 없다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겠지요.

3년차쯤부터 결혼의 실체가 본격적인 괘도에 오릅니다. 하나 둘 자녀가 출생하면서 예상치 못한 양상으로 인생이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슬슬 올라옵니다. (서로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냐고요? 사랑! 좋은 말씀입니다. 경험에 미루어 결혼 3년차부터는 사랑이 결혼 생활을 크게 좌우하지 않습니다.)

부부 외에 다른 조력자들의 만만치 않은 개입이 들어오는 것도 요때부터입니다. 크고 작은 갈등이 불거지고 이권 다툼도 벌어집니다. 저도 이맘때쯤 내 발등을 찍으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드라마 <최고의 이혼>은 결혼생활의 실체를 저와 비슷한 시각에서 들여다본 것 같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환상을 버려라, 결혼은 해결책이 아니다.” “남의 등에 업혀 살 생각 마라, 세상에 공짜란 없다.” “상대에게 올인 하지 마라, 그 힘으로 나 자신을 키워라.” 제가 틈만 나면 미혼의 에디터들에게 읊어대는 지청구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제 속도 편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자면 결혼은 선택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으니까요. 로버트 제임스 월러(Robert James Waller)의 소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나는군요. 중년의 프란체스카에게 운명적인 사랑 로버트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4일간 열병 같은 사랑을 나눕니다.

프란체스카에게는 가정이 있었지만, 말라비틀어진 꽃처럼 향기도 설렘도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떠나기로 했으나 프란체스카는 결국 남는 쪽을 택합니다.

가족을 버린 죄책감으로 행복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요. 먼 훗날 프란체스카는 유서를 남깁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죽어서는 못 다한 사랑을 위해 로즈먼 다리(사랑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고, 로버트의 유해가 뿌려진 곳)에 뿌려 달라는! 혹자는 불륜이라고, 또 다른 혹자는 저런 유서를 남길 바에야 떠나는 게 나았다고 비난을 퍼부을지 모르지만, 저는 프란체스카가 지켜낸 가족의 가치에 대해 조명하고 싶습니다.

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기면 그것에 대한 책임을 가볍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연탄재처럼 함부로 발로 차서도 안 되고(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에서 변용), 겨울 들판이라 가진 것도, 키울 것도 없을 거라 섣불리 단언해서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허형만의 시 <겨울 들판을 거닐며>에서 변용).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몇 사람의 인생이 오는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기 때문입니다(정현종의 시 <방문객>에서 변용).

결혼하십시오. 아이도 낳아 정성을 다해 키워야 합니다. 그에 앞서 결혼의 실체, 가족의 가치를 학습하세요. 더 정확히는 결혼으로 생기는 무한 책임의 무게와 몸으로 때워야 하는 가사와 육아라는 중노동의 강도를 가늠해보고 대비해야 합니다.

이걸로도 몹시 부족합니다. <최고의 이혼> 같은 드라마도 정주행 하고, 경험 많은 어른들의 푸념도 흘려듣지 마세요. 살아 있는 도서관입니다. 잠깐만요, 그렇게 힘든 결혼을 왜 하냐고요? 새해맞이 시(時) 한 편으로 대답을 대신할까 합니다.

이 시(時)에서 삶의 작은 힌트라도 찾는다면 좋겠습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장석주의 시 <대추 한 알>에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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