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바위 깃발바위…설악·월출산보다 더 있다, 전설
병풍바위 깃발바위…설악·월출산보다 더 있다, 전설
  • 최해영 기자
  • 승인 2022.05.13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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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 초입의 대전사 뒤에 우뚝한 기암(旗岩)의 위용. 일곱 개의 깃발이 나부끼는 듯하다 © 뉴스1

[신용석레인저가떴다] 

우리나라 산 이름은 대부분 산의 생김새(내장산)나 특징(설악산), 문화(태백산), 지리적(북한산) 의미를 찾아서 지었다. 그런데, 유독 전설에 나온 사람을 이름으로 한 산이 있으니 바로 주왕산이다.

주왕산의 본래 이름은 ‘바위가 병풍을 두른 듯’ 해서 석병산(石屛山)이었다가 주왕의 전설이 있다 하여 주왕산(周王山)으로 바뀌었다.

주왕이 중국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다 머나먼 이 산까지 피신을 왔다는 사람인지, 왕위계승에 실패해 이곳에 들어왔다는 신라 왕족인지에 대하여는 전설만 있을 뿐 역사적 기록이 없다.

여러 전설들을 종합해보면, 신라의 스토리를 둘러서 전하기 위해 중국의 ‘주왕 스토리’를 빌려왔거나, 변방의 산에 ‘왕(王) 이야기’를 붙여 산의 명성을 알리려 한 게 아니었는지 추측해 본다.

주왕산은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3대 바위산으로 회자되고 있다.

주왕산의 짙은 회색빛 바위들은 응회암(凝灰巖)으로, 약 7000만년 전 화산 폭발로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엉겨서 굳은 것이다. 이 암석들이 식으면서 수축할 때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흐르는 물과 얼음이 바위를 부수고 떼어내 오늘의 아름다운 바위협곡과 봉우리들이 조각되었다.

주왕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1827년 홍한주는 “주왕산이 북한산과 수락산 사이에 있었다면 최고의 명성을 얻었을 것인데, 영남 끄트머리 후미진 곳에 있어 신선의 세계를 쉽게 볼 수 없으니 불행이다.”라고 하였다.

주왕산은 주봉(726m)을 중심에 두고, 주변의 대둔산(905m), 왕거암(907m), 가메봉(882m) 등의 산과 봉우리들을 합쳐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산행코스는 대전사에서 주방계곡의 3개 폭포를 보고 되돌아오거나, 주봉에 올라 주방계곡을 둘러오는 코스다. 계곡길은 넓고 평탄해서 가족단위, 어르신 탐방객들이 많고, 대전사에서 용추폭포까지는 휠체어가 갈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다.

주봉을 오르내리는 등산로는 거리가 짧을 뿐 국립공원답게 꽤 경사도가 있는데, 대부분의 블로그에서 “별거 아니다”라고 쓰여있어 주의를 요한다.

◇ 대전사–주봉-후리메기 삼거리 4.8km “위풍당당한 깃발바위, 갑옷같은 병풍바위”

주왕산 길목에 있는 대전사(大典寺)는 주왕의 아들을 높여 부르는 대전도군(大典道君)에서 딴 이름이다. 절 뒤에 위풍당당한 바위봉우리가 병풍처럼 서있는 풍경이 압도적이다.

주왕산의 랜드마크인 이 봉우리의 이름은 기암이다.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아니라, 주왕 또는 신라의 장군이 깃발을 꼽았다는 바위(旗岩)다. 본래 하나의 큰 바위가 식으면서 기둥형태로 수축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일곱 개의 바위로 쪼개지면서 깃발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처님 손바닥같다고도 하는데, 나는 발가락처럼 보인다.
 

주왕산 파노라마. 주봉마루길의 두 번째 전망대에서 보는 바위병풍들 © 뉴스1

대전사 후문으로 나와, 계곡 갈림길에서 주봉(主峯)마루길이라 써 붙인 등산로를 오른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지만 15분 간격으로 있는 세 개의 전망대에서 바위산의 근경-중경-원경을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이른다. 울룩불룩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산허리를 빼곡하게 두른 모습이 산을 보호하는 갑옷같기도 하고, 레슬링 챔피언의 벨트같기도 하다.

최근에, 저멀리 어디선가 바위절벽을 좋아하는 산양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호랑이가 사라진 숲에서 왕 노릇을 하는 담비와 삵도 있으니 주왕산은 야생이 살아있는 생태계다.

세 번째 전망대를 지나, 깔딱고개의 긴 계단을 숨가쁘게 오르면 드디어 주봉이다. 대전사에서 2.3km, 1시간쯤 걸렸다. 밋밋한 평지에 나무에 가려 조망은 없고, 정상석도 뭉툭하다.

주봉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온 청년들은 한라산 등반을 위해 연습산행을 왔다고 한다. 내 눈에는 ‘산린이’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탄탄한 우정은 그 꿈을 반드시 이루게 할 것이다. 이 경상도 청년들의 억센 사투리에서도 여자들은 더 억세고 남자들은 좀 부드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산행복장을 단단히 한 사람들은 주봉에서 4.4km 떨어진 가메봉으로 올라가고, 소풍차림을 한 사람들은 칼등고개를 따라 후리메기로 내려간다. 칼등고개는 경사가 급하고 돌이 많아 조심해야 한다. 왜 후리메기인가? 산을 크게 휘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하고, 군사들이 훈련하던 ‘훈련목’으로 부르다 후리메기로 변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후리메기 삼거리까지 2.5km, 연녹색으로 물든 숲에 철쭉의 연분홍 꽃과 물푸레나무, 팥배나무, 가침박달의 흰꽃, 그리고 각시붓꽃의 보랏빛 꽃이 드문드문하다. 쭉쭉뻗은 소나무 사이로 멀리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봉긋봉긋하다.

◇ 후리메기-용연폭포-주왕굴-대전사 5.2km “지질교과서 용연폭포, 격렬한 용추협곡, 전설 어린 주왕굴”

주봉에서 45분쯤 내려와 계곡물을 만나고, 평탄한 오솔길을 15분쯤 걸어 후리메기 삼거리에 도착했다. 졸졸졸 계곡물 소리가 청량하다.

피천득 시인이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한 21살 청신한 얼굴이다”고 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나도 이 차고 맑은 물로 얼굴을 비벼본다. 찬 기운에 정신이 퍼뜩하고, 주변의 신록이 더욱 초록초록하게 보인다.

여기부터는 등산로가 아닌, 편한 산책로다. 길을 가다보니, 예전에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줄기 중간의 껍질을 벗겨낸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나무의 속살을 면도칼로 깊게, 수없이 그어댄 빗살무늬 흔적에 가슴이 아리다.
 

용연폭포. 왼쪽의 돌개구멍 3개를 만들고, 폭포는 계속 뒤로 후퇴한다 © 뉴스1
용연폭포 조감도. 과연 용이 노닐만한 신비한 풍경이다. 그림 진희란 © 뉴스1

1km를 내려선 삼거리에서, 주왕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용연폭포는 큰길에서 300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이 폭포는 지질학 교과서다.

하얀 폭포수 밑 연못의 바위면에 3개의 검은 동굴이 패여있다. 폭포에서 떨어진 강한 물살에 의해 자갈과 모래가 소용돌이 치면서 바위를 때려 패인 굴이다. 겨울에 얼음이 팽창하면서 바위를 더 깎아낸다.

놀라운 것은, 이런 동굴이 하나 하나 깎이면서 폭포의 뒷면 바위도 깎여, 결국 폭포는 점점 뒤로 물러난다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폭포다. 언젠가는 또하나의 동굴을 만들고 폭포는 더 뒤로 물러나 있을 것이다.

다시 탐방로를 되돌아 가, 큰길에서 200m 벗어나 있는 절구폭포를 알현한다. ‘육중한’ 용연폭포를 보고 난 후여서 그런지, 2단으로 단아하게 흘러내리는 절구폭포는 가냘프게 보인다. 폭포의 물줄기가 절구 모양이기도 하고, 1단 폭포(절구)가 자기가 만든 커다란 바위구멍(절구통)을 찧는 모습이기도 하다.
 

절구폭포. 1단 폭포가 절구가 되어 절구통(돌개구멍)을 찧는 모습이다 © 뉴스1

주방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산행차림보다 산책차림의 소풍객들이 더 많다. 맑고 얕은 물에 하얀 자갈들, 살짝 부는 바람과 물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이 하모니를 이루는 개울은 마치 작은 음악회를 연 듯하다.

졸릴만큼 편안한 흙길을 가다가, 갑자기! 턱! 나타난 거대한 바위제국으로 들어선다. 용이 승천했다는 용추(龍湫)협곡이다. 용이 몸통을 흔들면서 지나갔는지 휘휘 돌아가는 바위틈 통로에서,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카메라 세례를 퍼붓는다.

지질학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쪼개져 그 사이로 날카로운 물길이 생기고, 격렬한 물의 힘에 의해 암반이 깎이고 패여 다이내믹한 계곡이 생겨난 것이다.

협곡의 하류에 용추폭포가 있다. 폭포가 용이 솟아오른 자리라면, 그 위의 거치른 돌개(회오리)구멍과 맹렬한 물길은 용의 꼬리가 스친 곳이리라.
 

용추협곡. 용이 몸통을 흔들며 지나간 듯, 거대한 바위가 쪼개져 다이내믹한 계곡경관을 만들었다 © 뉴스1

협곡의 끝에서 되돌아보니 마치 비밀의 요새로 들어가듯, 신전에 들어서듯, 그런 신비감과 웅장함을 느낀다. 주왕산에만 있는 이국적인 바위풍경이다.

협곡을 빠져나오니 협곡의 수문장인 듯 사람 모습을 닮은 시루봉이 우뚝하고, 청학과 백학이 어울려 살았다는 학소(鶴巢)대가 높이 솟아 있다. 학소대에서 왼쪽의 절벽으로 가는 자연관찰로(1km)를 올라셔면 급수대 하단이다.

저 높은 곳에서 궁을 짓고 살았던 주왕이 물을 길어 올렸다는 바위절벽이다. 가까이 보면 나무젓가락같은 수백개의 주상절리 기둥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바위는 살아있다. 금방 돌을 떨어뜨린 듯한 자국이 많다.
 

망월대에서 본 바위제국. 왼쪽 연화봉과 병풍바위. 오른쪽 급수대 © 뉴스1

절벽길의 망월대 전망대에서 계곡 건너편의 둥글넓적한 연화봉과 병풍바위, 지나온 급수대의 뾰족한 바위경관을 올려다본다. 우람하고 웅장한, 절대로 함락되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난공불락의 바위성(城)이다.

오솔길을 내려가 주왕암에 이른다. 단촐한 절 뒤편으로 좁은 바위틈을 지나 철계단을 오르면 절벽 끝에 주왕굴이 패여 있다. 폭 2m, 길이 9m에 불과한 이 좁은 굴에서 주왕이 피신해 있었다고 한다. 굴 입구 옆으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내려와 물 파편이 튄다.

여기서 세수를 하다가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주왕이 죽고, 그 핏물이 주방계곡으로 흘러가서 붉은 산철쭉, 수달래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주방계곡에 유명했던 수달래는 몇년 전의 수해로 많이 떠내려 갔는데, 계곡에 암반이 많아 복원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주왕굴. 굴 입구에 소원을 비는 방문객들의 부적이 빼곡하다 © 뉴스1

내려가는 탐방로의 끝지점에 기암 형태로 디자인해서 ‘아름다운 화장실 상’을 받은 ‘기암 화장실’이 있다. 그 외벽에 주왕산을 상징하는 압축적인 표어가 새겨져 있다. ...‘솟아오른 특별한 아름다움, 주왕산국립공원.’

곧 대전사 마당을 지나 음식냄새가 자욱한 상가를 통과하며, 절경과 전설의 장소를 구석구석 탐색한 10km, 5시간 산행을 마친다.

◇ 주산지. 길이 100m, 너비 50m “시간마다 풍경이 다르고, 사람마다 느낌이 다른 신비의 저수지”

주산지(注山池)는 주왕산과 한 묶음으로 여행하는 명소로, 딱 300년 전인 1721년에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이다.

이곳이 유명세를 탄 것은 고 김기덕 감독이 20년 전에 내놓은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로 알려진 이후부터다. 4계절처럼, 서로 다른 것같지만 이어지는 인생을 살고, 결국 다시 봄이 와서 그런 인생을 반복한다는 영화다. 주산지의 가운데에 뗏목을 띄우고, 그 위에 암자를 올린 무대세트가 눈에 선하다.

물에 잠긴 200년생이 넘는 왕버들과 능수버들이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지고, 그런 모습이 그림자로 투영된 주산지의 풍경은 한폭의 수채화다. 일교차가 큰 가을의 이른 아침에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몽환적인 풍경은 한폭의 수묵화다.

어느 때는 바람도 물결도 소리도 시간도 모든 것이 멈춘 한폭의 추상화다. 어떤 날은, 물도 줄고 왕버들도 시들하고 햇빛만 쨍쨍했다고 실망하는 빈 공간이다. 같은 장소인데 시간마다 사람마다 풍경이 확연하게 다르다.
 

주산지. 왕벚나무 고목이 수면에 투영된 환상적인 뷰. 이 아름다운 저수지의 안쪽은 수달 보호구역이다. 사진 제공 설정욱 © 뉴스1

주왕산을 품은 청송은 푸른 소나무처럼 기상과 건강미가 넘치는 고장이다.

우윳빛 계곡암반이 물결처럼 구겨진 백석탄(白石灘), 겨울 빙폭이 유명한 얼음골, 아흔아홉 칸 송소고택(松韶 古宅), 그리고 청송-영양-봉화-영월을 잇는 외씨버선길 등 생태·문화·지질관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고장이다. 국제 슬로(slow)시티이자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된 국제적 명소이기도 하다.

청송사과와 달기약수로 만든 백숙은 믿고 먹는 브랜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국적인 바위협곡 주왕산과 공기 맑은 산소까페…청송을 찾아, 계절의 여왕 5월을 만끽해보자!

최해영 기자 news@wedding21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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